잠재의식은 현재의 의식보다 3만 배 강하다. 잠재의식은 현재 의식의 명령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잠재의식은 현재 의식처럼 논리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
잠재의식의 힘 ( 조셉머피 ) 책은 광범위한 인기를 끌었고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부가 팔린 책입니다. 잠재의식의 힘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며, 긍정적인 사고와 시각화를 통해 성공을 이루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중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의 세계를 바꾸려면 내면을 변화시키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잠재의식은 내면의 암실과 같다는 개념을 이해한다면 잠재의식의 힘을 발견하는 여정에 즐겁게 임할 수 있다. 특정생각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 마음에 스며들어 제2의 본성이 된다. 걷거나 수영하거나 피아노 치는 법을 배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게 바로 기도이자 잠재의식이 작동하는 고차원적인 원리다. 휘발유를 넣는다고 바로 차가 굴러가는 게 아니다. 먼저 휘발유를 태워서 증기로 변환해야 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가짐을 바꿔야만 자신의 세계를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잠재의식의 암실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공간이자 부가 생산 되는 곳이다. 그러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살면서 풍요를 찾기 전에 잠재의식을 먼저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마음의 법칙은 곧 믿음의 법칙이다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을 믿는 게 마음의 법칙이다 그리고 믿음 그 자체를 선봉 하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의 개념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으로 좁혀질 수 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경험들과 사건뿐만 아니라 조건과 행동은 생각에 대한 잠재의식의 반응이다. 어떤 종교를 믿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속에 깃든 믿음이 결과를 좌우한다는 것 잊어서는 안 된다. 잠재의식은 작용과 반작용의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기도에 응답한다. 먼저 일어나는 작용이 생각이라면 반작용은 생각의 본질에 맞게 잠재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응답이다 같은 원리로 마음을 조화로운 상태에 놓고 건강과 평화 선의로 채우면 삶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모든 생각은 원인이고 모든 상황은 그 결과다.
나 자신이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만 원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내부세계 즉 내면을 적극적으로 돌본다. 내면이 외면을 창조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창조력은 내부세계에만 있다. 삶면서 외부에 발현되는 것은 결국 내부 세계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내 창조물이다.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의 차이
잠재의식은 현재의식의 믿음에 깔려 있는 메시지를 받아들인다. 잠재의식은 현재 의식처럼 사물을 판단하지 않고 논쟁하지 않는다. 그래서 잠재의식은 좋든 나쁘든 모든 씨앗의 싹을 틔우는 토양과 같고 생각은 생명력을 불어넣는 씨앗에 비유할 수 있다. 잠재의식은 지금 하는 생각이 좋은지 나쁜지,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하는 데는 관심이 없는 걸 명심하자 그 생각에 시사하는 바에 따라 반응할 뿐이다.
잠재의식은 어떤 말이 틀렸다고 논쟁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능력이 없다
잠재의식은 잘못된 정보를 주어도 사실이라고 받아들인후 정말 사실로 만든다. 거짓된 암시를 주더라도 그 암시를 상황이 나 경험 사건으로 바꾸어 놓는다. 나의 모든 일은 내가 특정한 생각을 품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생각이 믿음이 되어 잠재의식에 각인이 되었기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 그러니 잠재의식이 잘못되거나 왜곡된 개념을 전달했다면 빨리 바로 잡는 것이 급선무다. 잠재의식에 건설적이고 조화로운 생각을 반복해서 보내는 게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습관은 잠재의식에서 싹튼다.
잠재의식은 삼단 논법을 따른다
현재의식이 참이라고 믿는 대전제에서 잠재의식은 결론을 도출해 낸다. 문제나 질문의 유형이 실제로 무엇인지는 상관이 없다. 잠재의식은 전제가 참이라면 결론도 반드시 참이라는 삼단 논법을 따른다. 예를 들면 형상을 가진 모든 물체는 변하고 사라진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형상을 가진 물체다. 따라서 피라미드는 변하고 사라질 것이다. 또 다른 예는 모든 미덕은 칭찬받을 만하다. 친절은 미덕이다. 따라서 친절은 칭찬받을 만하다. 전제를 올바르게 세우면 결론도 올바르기 마련이다. 대전제가 파괴적이면 논리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대전제를 새롭게 세우고 사고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