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현상계는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생각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진아의 지복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은 언제나 이 진아와 함께 한다.
나는 누구인가 ( 라마나 라하리쉬 ). 라마나 마하리쉬인도의 힌두교 구루로, 20세기 가장 유명한 인도 구루 중 한 명입니다. 이 책은 자아 탐구를 통해 진정한 본질인 진아 (眞我)를 발견해야 한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진아란 무엇인가
감각적으로 또는 생각을 체험하는 자기는 진정한 내가 아니며 스스로 자기라고 동일시하는 것들을 다 ~ 부정한 다음에 남는 순수한 진정한 나 즉 진아라고 한다. 이 진아는 개체적 자아와 혼돈되어서는 안 된다. 개체적자아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마음이 거짓되게 만들어 낸 것이고 진정한 나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진아는 항상 존재하며 우리가 항상 체험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때는 오직 스스로의 한계를 짓는 경향을 가진 마음이 사라졌을 때뿐이라고 강조한다. 마음이 영원히 사라져서 진아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난 상태가 깨달음이다
실제 의식, 지복
라마나는 실제 하는 것은 오직 진아뿐이며 이진아는 단순히 보이는 대상 객체와 분리된 보는 자 주체가 아니라 이 둘을 함께 포함한 순수의식이라고 한다. 또 이 진아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상태는 지극한 행복의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지복이라고도 한다.
신
유신론자들은 보통이 힘이 신에게서 기인한다고 보기 때문에 라마나는 신이라는 단어를 진아와 동의어로서 가끔 사용한다. 라마나가 말하는 신이란 구체적인 이름과 형상을 가진 신이 아니라 우주를 유지하는 무형의 존재다 신은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며 우주는 신의 본래적인 힘이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주로부터 신을 분리할 수 없지만 우주가 나타나든 사라지든 신은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가슴
라마나는 진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슴은 '이것이 중심이다'가 될 것이다. 여기에는 2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라마나는 평소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각자의 영 수준에 따라 그 가르침의 내용을 달리하였는데 이 가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에서 그의 그와 같은 행동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진아를 직접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아와 동일한 의미로 가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진아에는 안도, 밖도 없고 , 아무런 형태도 위치도 없지만 그러면서 모든 것의 중심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육체가 나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육체에 있어서의 특정부위 즉 가슴의 중심으로부터 3.75cm 오른쪽이 가슴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이 인간의 모든 영적 체험의 중심이라고 가르쳤다.
순수한 앎이란 무엇입니까? 또 인간은 어떻게 그것을 얻어서 어떻게 키워나가야 합니까?
그대가 바로 순수한 앎이다. 순수한 앎은 그대의 다른 이름이다. 그대 자신이 바로 순수한 앎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거나 키워나가야 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단지 진아가 아닌 것들을 진아로 오인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그때 순수한 앎만이 남으며 그것이 바로 진아이다
제가 바로 순수한 앎이라면 지금 당장 여기서 진아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원성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현재 가지고 있는 앎은 에고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상대적인 것이다. 그 상대적인 앎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나누어져 있지만 진아에는 절대적이며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초월해 있다. 기억이란 것도 마찬가로 상대적이며 기억되는 객체와 기억되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이 이원성이 사라진다면 누가 누구를 기억하겠는가, 진아는 항상 존재한다 누구나 진아를 알고자 하는데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여 무슨 도움이 필요하단 말인가? 사람들은 진아를 뭔가 새로운 것을 보고자 하지만 하지만 그것은 영원하며 항상 똑같은 상태로 남아있다. 그건 있는 그대로이며 그것은 결코 정의될 수 없으며 가장 훌륭한 정의가 있다면 나는 나로서의 나라는 정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