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느와르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그의 그림 속에서 여성의 몸은 놀랄 만큼 생생하게 느껴진다. 많은 화가들이 여성의 몸을 그렸지만 르느와르에 필적할만한 화가는 없다. 무엇이 다른가? 다른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여체를 그렸지만 르느와르는 손에 만져지는 듯한 여체를 그렸다. 그래서 그가 그린 여성의 몸은 온기와 친밀감이 살아있다.
버려라, 타인과 친해지는 두려움 ( 오쇼 라즈니쉬 Osho Rajneesh, 1931~1990 ) 저자는 인도 출신의 영적 스승이자 철학자, 작가로, 명상과 내면적 성찰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의식을 확장시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생애 동안 전 세계적으로 많은 추종자를 모았으며, 특히 그의 독창적이고 논쟁적인 가르침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책 '버려라, 타인과 친해지는 두려움'은 단순히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을 제공하는 실용적인 조언서라기보다는, 인간관계와 내적 자유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제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책 두번쩨 리뷰 입니다
명상이란 혼자서도 기쁨으로 넘치는 능력을 뜻한다.
사실 아무 이유 없이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은 드물다. 조용히 앉아서 지복에 젖어들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명상은 최고의 마약이다. 명상은 그대 안에 정신적 능력을 발현시킨다. 그대 안에 갇혀 있던 황홀한 빛을 밖으로 드러낸다. 이때 그대는 혼자 있어도 행복으로 충만하고 존재의 중심으로부터 환희가 솟아오르기 때문에 어떤 외적 관계도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여전히 사람들과 교류하겠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관계 이상일 것이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대는 사랑을 나누어 준다. 그대 안에 사랑이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더 많이 줄수록 그대는 더 충만해진다. 이것이 사랑의 마술이다. 주면 줄수록 더 많이 갖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아무도 삶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삶은 불확실하다. 아무도 삶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삶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삶은 무미건조한 것이 되고 만다. 삶은 대단히 섬세하여 부서지기 쉽다. 항상 미지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삶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용기가 있어야 한다. 모험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도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도박사가 돼라 이 순간을 살라. 이 순간을 전체적으로 살라. 다음순간이 오면 그 순간과 부딪쳐라. 지나간 순간의 경험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하면 좀 더 능란하게 다음 순간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다음순간에도 상대가 거기 있어줄 것이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있는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생각은 모두 내려놓아라 사랑할 수 있으면 사랑하라. 사랑할 수 없으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 괜히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문제는 상대가 이 사람이냐, 저 사람이냐, 가 아니다. 문제는 사랑자체다. 내면의 행복을 가져오는 건 바로 사랑이다. 상대는 구실에 불과하다. 지금의 상대에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음에 오는 상대들에게도 할 것이다. 때문에 모든 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대가 상대를 행복하게 해 주면 상대가 떠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먼저 행복한 사람이 돼라 지금 이 시간에 행복한 사람이 돼라.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시간으로 충분하다. 지금부터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라. 이 순간을 걱정하는데 쓰지 말고 진정으로 사는데 쓰라 그러면 작은 것도 아름다워진다. 작은 배려, 작은 나눔 , 이들이 삶의 전부다.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고 이야기하면 그대는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무언가를 억압하는 사람은 계속 억압된 대상 위에 앉아 있어야 한다. 그는 계속 불안해한다. 한순간도 쉬지 못한다. 왜 휴식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 되었는가, 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가. 왜 편히 쉬지 못하는가, 왜 마음을 푹 놓지 못하는가 , 왜 야하면 수많은 것들을 억압해 놓았기 때문이다. 편히 쉬면 억압해 놓은 것들이 떠오를까 봐 두려운 것이다. 마음은 항상 싸워야 한다, 아니면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싸우는 것은 곧 억압하는 것이다. 싸우지 못하면 달아나는 걸 선택한다. 대체 어디로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분노의 그림자가 쫓아온다. 성욕의 그림자가 쫓아온다. 그대가 가는 곳마다 그림자는 쫓아온다.
내면의 중심에는 외부의 햇빛이 들어오지 못한다. 그래서 항상 그늘 속에 있다. 장자는 그놈을 '도'라고 부른다, 도는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본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에 말을 듣지 않아야 한다. 마음은 세상을 사는데 귀중한 도구다. 하지만 내면으로 들어가는 데는 장애물이다. 논리는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는 데는 훌륭하지만 자신을 상대하는 데는 훌륭하지 않다. 사물을 다루는 데는 논리와 회의는 필요하다. 과학은 회의를 바탕으로하나 종교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깊은 믿음으로 앉으라. 그러면 내면의 본성이 그대를 이끌 것이다. 내면의 본성은 항상 거기 있었다. 그러므로 눈을 감고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마음이 어떤 말을 할지라도 마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싸우지 마라. 마음과 싸우려고 들면 마음이 그대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냥 마음을 한쪽에 제쳐둬라, 이것이 신뢰다, 신뢰하는 사람은 마음과 싸우지 않는다. 마음과 싸우면 마음에 동화되어 버린다. 마음을 설복시키려고 마음과 논쟁을 하면 그대는 마음의 술수에 걸려들고 만다. 그냥 마음을 한쪽으로 제쳐둬라. 마음을 한쪽으로 제쳐두는 일은 마음을 무찌르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넘어가는 일이다.
집안으로 들어올 때는 신을 한쪽에 벗어놓는다. 그대는 집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신발과 싸우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이제 집안으로 들어가 신발이 필요 없으니까 벗어야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벗어서 한쪽에 놓을 뿐이다. 쉬운 것이 바른 것이다. 쉽고 바른길을 가는 사람은 싸우지 않는다. 갈등도 대립도 하지 않는다. 그냥 마음을 한쪽에 벗어두고 앉아서 내면의 그늘로 들어간다. 거기에서는 발소리도 나지 않고 그림자도 따라오지 않는다. 그대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대는 원래의 그대 '참나'가 될 수 있다. 단언하건대 그대는 신과 같은 존재다. 아니 신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을 만날 때까지 포기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