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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고요함의 지혜 ( 에크하르트 톨레 )

 

나는 우주 전체에 무수의 많은 형태로 모습을 나타내는 한 생명의 일부입니다.   꽃 한 송이 나무 한그루가  성스러움, 아름다움, 깊은 고요함, 그리고 당당함 속에 거하는 걸 내가 바라볼 때 나는 그 꽃과 나무에게 무언가를 보태는 것입니다.  나의 인식과 맑은 마음을 통해서 자연 역시 자기 자신을 알게 됩니다.  자연은 바로 나를 통해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고요함의 장안에서 자연을 지각하고 자연과 함께 할 때 그 안에 나의 맑은 마음이 두루 퍼집니다. 그것이 내가 자연에 주는 선물입니다. 

 

고요함의 지혜 . 책표지

 

고요함의 지혜  ( 에크하르트 톨레  ) 지금까지도 독자들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에크하르트 돌레의  두 번째 저서입니다. 이 책은 스피릿셜 철학과 내면의 깨달음에 관한 주제를 다루며, 특히 고요함과 정적인 상태에서 존재하는 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는 공간을 만드십시오. 

자연을 볼 때 우선 마음속에 아무런 생각도 없는 공간을 만드십시오. 이렇게 다가갈 때 자연도 당신에게 다가와 인간의식을 진화시키고 나아가  지구의식의 진화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꽃 한 송이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모습, 삶을 완전히 수능 한 모습을 보십시오. 집에서 기르는 꽃이나 나무를 진정 바라본 일이 있는가요? 그 꽃이 얼마나 깊이 평화로운지를 보았는가요? 꽃 한 송이가 발하는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는 순간  그 꽃은 당신의 스승이 됩니다. 가름할 수 없는 당당함과 순수함과 성스러움이 거기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려면 우선 사물에 이름표를 붙이고 분류하는 마음의 습관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때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차원, 감각으로는 지각할 수 없고,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자연의 차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조화로움입니다.  전체의 자연뿐 아니라 내 안에도 고루 스며있는 성스러움입니다. 

 

 

개념적 정체성을 넘어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온 마음을 다 줄 때 그와 나에 인간관계에서 과거와 미래가 다 사라지고 다만 실제적인 것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 그와 온전히 함께 할 수 있을 때  그에 대한 개념적 정체성을 넘어서서 두려움이나 욕망에 휘둘리는 일없이 그와 대화할 수 있습니다. 개념적 정체성이란 그가 누구이고 과거에는 무엇을 했다는 내 나름의 주관적인 판단을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전념 즉 깨어 있는 고요함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여유롭만으로 누가 들어오든 다 귀한 손님으로 맞이할 때 그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도록 내버려 둘 때 그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을 진정 제대로 알려면 그에 대한 어떤 것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과거와 역사 그의 이야기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에 대한 앎과 개념을 떠난 깊은 앎을 혼돈합니다.  전자는 생각을 통해서 작용하고 후자는 고요함을 통해 작용합니다.  생각의 장벽이 없을 때 사랑은 자연스럽게 모든 인간관계에 스며듭니다. 

 

 

고요한 시간을 함께 하십시오 

인간의 대화와 교류는 대체로 말을 주고받는 것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즉 사고의 영역에 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반드시 약간의 고요함이 필요합니다. 특히 가까운 관계에서는 더욱더 필요합니다. 고요함이 가져오는 드넓은 공간에 여유로움 없이는 어떤 인간 관계도 자라날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자연 속에서 명상하십시오  고요한 시간을 함께 하십시오. 그와 자연 속으로 산책을 가고  함께 차 안에 앉아 있으십시오  집에 있을 때에도 고요함 속에 함께 있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해야 합니다.  고요함은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며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고요함은 이미 여기에 존재합니다.  다만 소란한 마음이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저 마음을 열고 고요함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드넓은 교요함이 없다면 인간관계는 생각의 지배를 받아 문제와 갈등에 사로 잡히기 쉽습니다. 하지만 고요함이 있다면 무엇이든 다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분자적인 차원으로 내려가면 사물의 실체가 진동하는 에너지장임을 이미 증명했습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비롯 순간에 불구하더라도 당신은 그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함으로써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가요? 아니면 그 사람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하나의 기능이나 역할로 격하시키는가요? 슈퍼마켓 계산원과 당신의 관계는 어떤가요? 당신의 고객과 주차 관리원, 수선공은?  잠시만 전념하면 충분합니다.  그 사람을 바라보거나 그의 말을 들을 때 2, 3초 정도  생생한 고요함이 자리하면 됩니다. 우리가 평소 행하고 동일화하는 역할 이상의 실제적인 것이 나타나려면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모든 역할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습관이 된 의식의 일부입니다.  온전한 전념을 줄 때 나타나는 것은 습관화되기 이전의 것입니다.  나의 이름과 형상 밑에 있는 나의 실체입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대본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닙니다.  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 차원이 나의 내면에서 솟아오를 때 남의 내면에서도 같은 차원을 이끌어 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남이란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만나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