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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유는 나에게 있다 ( 인생의 마지막 질문, 정재현 )

 

우리는 모르고 사는 것 못지않게 살고도 모른다.  이것이 중요하다. 모르고 사는 것은 불안을 자아내는듯하지만  살고도 모르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안도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은 삶으로 내 던져졌고 이미 나도 모르게 모름을 벗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더 좋은 내가 되어야겠다고  더 열심히 가꿔야겠다고 하지 않아도 좋다  그래봤자 더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닥칠  수많은 모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순간적으로 반짝거려서 대단해 보일 수도 있지만 참으로 잠깐이다 그 잠깐 보다는 우리 인생이 훨씬 더 길다.

 

인생의 마지막 질문. 책표지

 

인생의 마지막 질문 ( 정재현 ) 연세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종교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삶의 이치를 탐구하고, 위기에서 사람을 구하는 깊은 지혜를 제시합니다. 이 책은 수천 년간 이어져온 경전부터 현대철학과 문학까지 다양한 고전들로부터 지혜의 정수 100가지를 선별하여 막막한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합니다. 또 종교적인 삶의 한계와 마주하는 '왜'라는 탄식에 주목하며, 지식으로는 다 알 수 없는 '모름의 지혜'를 통해 우리를 인도합니다.

 

 

'왜 그래?'와 괜찮아' 사이 

태어난 두두 달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 아무 이유도 없이 해 질 녘부터 밤까지 꼬박 3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 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기 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뜩 말해 봤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지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뒤부터 아이는 저녁울음을 멈췄다.  이제 알았다 내 안에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론 나의 울음을 우는 것이지만 내 울음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울음을 내 안에서 듣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억지로 울음을 멈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 괜찮아 '라고 다독였더니  오히려 다른 사람의 느낌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함께 울고 더불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괜찮아' 야 말로  이렇게 더불어 살게 해주는 지혜인듯하다.  그러나 '괜찮아'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값싼 것은 아니다  무수한 '왜 그래'라는 물음과 시행착오를 거친 것이다.  그러니 사실 '왜 그래?'도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바로 '괜찮아'로 도망간다면 사실 '괜찮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왜 그래? 는중요하다 다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답이 있을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지점에서 '괜찮아'라는 말이 내게로 들어온다. 

 

 

이유는 나에게 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갖게 되었지만 익숙해 지다가 이내 싫증을 느낀다. 그것은 사물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싫증나 있는 것이다. 손에 넣은 것이 자기 안에서 변하지 않기 에 질린다  즉 대상에 대한 자신의 마음에 그대로 변치 않기 때문에 흥미를 잃는다.  결국 계속해서 성장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쉽게 싫증을 느낀다.  오히려 인간으로서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은 계속적으로 변화하기에 똑같은 사물을 가지고 있어도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오묘하다.   익숙해지면 좋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싫증을 느끼게 될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는 편안함과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익숙함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싫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보다 그것에 익숙해져서 흥미를 잃어버린 자기 자신에게 느끼는 싫증일 수 있다. 바뀌지 않는 나 자신이 싫어지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이 문제의 근원이다 니체는 나 자신이 바뀌면 보는 관점이 달라지므로 그것에 대해 싫증을 느낄 새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고통은 극복되기보다는 겪어 가는 것

작가 박완서는 말합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위로한답시고 방문한 지인들이 즐겨하는 표현을 놓고 분노한다.  하느님께서 의인을 먼저 데려가신다는 것이다.  세상이 너무도 혼탁하여 당신의 아들과 처럼 깨끗한 의인을 그냥 둘 수 없어 아름다운 천국에 먼저 데려가서 귀한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이런 위로의 말은 그러나 위로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부모가 자식을 올바르게 가르치려고 하겠는가?라고 되물으며 절규한다  고통이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박완서는 말한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행복의 정점이고 이후에는 하강할 수밖에 없다는 생리가 가르쳐 주는 것처럼  참된 행복은 오히려 행복하다는 의식조차 없는 상태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스스로 비우고 넘어서는 것이 행복의 길이 아닌가 싶다.  만족만 추구하다면 거꾸로 불만족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이치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