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당신을 불러 봅니다. 거기는 지낼만한가요? 난 여전히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 37살이 되었고 웃을 때면 눈가에 잔주름이 파이기 시작하고 가르마 오른쪽으로 흰머리가 꽤 났습니다. 아마 머리가 빨리 희여지려나봐요. 한 살 한 살 내가 나이 들어갈 모습 조금씩 늙어갈 모습이 궁금하다고 언젠가 당신이 말했었지요
노란 무늬 영원 ( 한강 ) 스웨덴 한림원은 그녀의 작품이 "역사적 트라우마와 인간 삶의 연약함을 강렬하게 표현한 시적 산문"이라는 평가와 함께 노벨상 수상 이유를 밝혔습니다. 이로써 그녀는 전 세계 문학계에서 중요한 입지를 다지며 한국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대표작으로는'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 등이 있으며, 국내외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한강은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섬세하고 심오한 감수성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70년에 태어난 그녀는 1994년 단편 소설 '붉은 닻'으로 등단한 이후,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왔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주로 인간 내면의 고통, 상처, 그리고 치유 과정을 다루며, 강렬한 이미지와 서정적인 문체가 특징입니다. 한강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채식주의자'로, 이 소설은 인간의 본능과 폭력성, 자아와 욕망을 독특하게 풀어내어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한강의 소설집 '노랑무늬영원'은 죽음과 상실,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섬세하게 다룬 작품입니다.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남겨진 이들이 겪는 내면의 슬픔과 고통을 묘사하며, 상처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려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서정적으로 풀어냅니다. 특히 한강은 비선형적인 시간 구조를 활용하여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독자에게 죽음과 삶, 재생과 치유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합니다.
본문의 일부 ( 파란 돌 )
얼마 전 신문에서 이런 행동 유형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옛 친구에게 갑자기 연락한다. 은사를 찾는다. 성직자를 만난다. 갑자기 성격이 밝아진 것처럼 보인다. 자살을 앞둔 사람들의 공통적인 행동들이니 주의 깊게 관찰하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들 모두가 1년 전 이맘때 내가 한일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 나는 조금 막막해졌습니다. 기사와 한 가지 다른 점은 자살을 앞둔 시점이 아니라 시도한 그날 오전부터 한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중략--
50여 통의 전화를 모두 끝내고 나자, 네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습니다. 대체 그건 무엇을 위한 행동이었을까요? 필사적으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었던 걸까요? 좋은 추억을 되살리고 싶었던 걸까요? 그렇게 해서라도 그즈음에 일들을 겪지 않은 예전의 나를 불러 내려던 걸까요? 받아들이기도 , 지우기도 어려운 상황과 기억을 그런 식으로 희석시키려 했던 걸까요? 어찌 된 든 그 후에 한 달은 예기치 않았던 약속들로 채워졌습니다. --중략--
어쩌면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광기 어린 손놀림으로 전화번호를 누르던 그 오전, 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것은 당신의 목소리였는지도, 내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의 목소리는 언제나 낮고 부드러웠지요. 실은 일부러 못 들 은척 해 두 번 부르게 한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 목소리에 처음 가슴이 두근거린 게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처음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언제 인지도 구별 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당신의 얼굴이 내 눈앞 어딘가에 어렴풋한 그림자처럼 자리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이미 모든 사물 위로 아련히 어려있고 , 놀란 눈을 감으면 어두운 눈꺼풀 위로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그 느낌이 강한 슬픔과 닮아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나는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그 느낌이 강렬해진 늦봄, 나는 당분간 당신의 작업실에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당신 앞에서 떨리는 손, 둘 데 없는 눈길, 시시로 달아오르는 뺨, 무엇보다 당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날카로운 꼬챙이 같은 것에 꾀인 듯 가슴에 찔리는 통증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러자 막상 당신에게 가지 않자 깊기만 하던 가슴의 통증이 마치 넓게 도려내어진 듯, 슴벅거려 더욱 견디기 어려워졌습니다. 한 달 만에 다시 당신을 찾았을 때 나는 얼마간 체념한 채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습니다. 내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선을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그토록 내 마음을 괴롭혔던 그 사람인지, 할 수 있다면 나를 단번에 실망시킬 구석을 찾아내 그 이상한 고통을 통째로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 어디가 아팠니?"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이 가슴으로 올라왔습니다. 가슴뼈 사이에 오목한 곳, 어떤 장기도 없는, 그렇게 아파보기 전에는 그런 장소가 몸에 있는지 조차 몰랐던 곳이었습니다. 당신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손을 뻗어 내손을 가볍게 쥐었습니다. 담담하게 , 무언가를 위로하듯이 , 결렬한 비참함과 환희가 동시에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그 혼란한 순간 내가 희미하게 깨달은 것은 그 모든 고통이 아마도 당신을 통해서만 달래어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그래도 끈의 기억은 괜찮습니다. 잠든 지 채 10분도 되기 전에 목덜미에 느껴지는 손의 감촉, 따뜻한 첫 열기와 압력의 기억에 비하면 말입니다. 1년을 돌아와 이만큼 희미해졌다면 10분씩의 선점이 간간이 30분 싹으로 늘어왔다면 기억을 등지고 나아가야 할길 은 얼마나 멀까요? 얼마만큼 무엇을 넘어갈 수 있을까요? 넘어갈 수 있기는 한 걸까요? 그렇게 몸서리치고 깨고 나면 아이의 이불을 덮어주고 덩어리 져 스멀거리는 어둠의 틈과 마디들을 헤아리며 잠을 청합니다. 그러다가 가끔은 당신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문밖으로 빗소리가 추적추적 들려오던 그 오후, 두려워하던 그 입술이 만나던 순간 두 사람 모두 입술을 벌리지도 못한 채 서로의 부드러움이 떠날 것이 두려워 뛰는 심장들을 맞붙이고 있었지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그 입맞춤이 나는 그 어떤 남자에게서도 더 이상의 기쁨을 얻지 못했습니다. 어떤 흥분과 무아경의 희열과도 바꿀 수 없을 겁니다. 나이만 먹은 소년이었던 당신의 겁먹은 손이 숨죽이며 내 뺨에 머물렀던 순간을 --중략--
아파서 힘들었던 적은 없어요? 화나지 않았어요? 작은 피멍이 든 당신의 손등을 내 뺨에 가만히 쓸며 나는 나는 물었습니다. " 아니" 당신은 가볍게 웃었지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당신의 장난스러운 얼굴을 향해 함께 웃어줘야 하는 건지 나는 잘 알 수 없었습니다. --중략--
한차례 파도가 밀려나간 사이 잠깐 드러난 부드러운 모래뻘처럼 우리가 여기 머무르는 순간은 짧은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문득 당신의 그림이 보고 싶어 집니다. 어쩌면 시간이란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에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더라고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 게 아니라고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고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물어도 되겠지요 " 거긴 지낼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영원히 가져오지 못하게 된 감자 생각은 잊었나요? 오래전 꿨다는 꿈속의 당신, 부푼 오른팔로 파란 돌을 건지고 있나요? 물의 감촉이 느껴지나요? 햇빛이 느껴지나요? 살아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잔잔한, 너무나도 애잔은 클래식을 듣는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