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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죽음보다 더 큰 거짓은 없다. (누구도 죽지 않는다, 오쇼 라즈니쉬 )

 

 죽음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신체의 붕괴일 뿐이다. 영혼은 신체와 함께 다른 탄생을 위해 여행을 한다. 궁극적인 죽음은  신체까지 사라지고, 영혼이 전체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누구도 죽지 않는다. 책표지

누구도 죽지 않는다( 오쇼 라즈니쉬 ) 오쇼 라즈니쉬라는 이름의 뜻은 '하늘이 꽃비를 내리는 축복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달라이라마, 디팩초프라가 극찬하는 분이시며 , 삶과 죽음, 전생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를 죽이기 위한 독약이 조제되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물었다.  "너무 늦는군 독약을 만드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려야 하는가? "   친구들이 울면서 말했다. " 자네 미쳤나 우리는 제네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를 바라네, 우리가 독약 제조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었다네 천천히 해 달라고 말이네"  소크라테스는 밖으로 나가서 독약을 빻고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걸 자네는 별로 솜씨가 없는 모양이군 이런 일이 처음인가?" 그 남자는 대답했다. " 나는 평생 독약을 주며 살아왔지만 당신처럼 미친 사람은 처음 봅니다. 왜 그렇게 죽는 것을 서두르시오?"  소크라 테스는 말했다.  " 죽음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 보고 싶고 그리고 나는 또한 죽음이 일어났을 때 내가 살아남는지  아닌지를 보고 싶다.    나는 죽음이 살아남을지 아니면 내가 살아남을지를 보고 싶다. 하지만 내가 지금처럼 살아있다면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  소크라 테스에게 독약이 주어졌다. 친구들은 울기 시작했다 그때 소크라 테스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친구들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독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무릎밑으로는 내 다리는 완전히 죽어 버렸다. 심지어 잘라 버려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이요 내 다리는 죽었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다. 이제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는 다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내 안에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울지 말라 지켜보라 , 이것은 좋은 기회이다. 한 사람이 죽어 가면서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내손이 죽어가고 있다. 잘라버려도 나는 아직 여기 있다.  아! 나는 이손을 나 자신과 얼마나 동일시했던가.  서서히 모든 것이 평화로워진다. 모든 것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그는 말했다. "이제 아마도 이것이 나의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의 혀가 굳어지고 있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예수는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이렇게 말했다.

" 오 신이요!  이 자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문장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즉 이 불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와 같은 훌륭한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다! '  그것은 예수가 의미한 바가 아니다.  예수가 말한 것은 이것이었다.  "이 어리석은 자들은 그들이 죽이려 하고 있는 사람이 죽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불가능한 살인행위를 범하고 있습니다."

 

 

탄생과 죽음은 우리가 옷을 갈아입거나 말을 갈아타는 지점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을 보는 것 , 죽음을 이해하는 것, 죽음을 아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죽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사람은 오직 죽어가는 동안에만 죽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인가?.  인간이 오직 죽어가는 동안에만 죽음을 볼 수 있다면 죽음을 이해하는 방법은 전혀 없다. 왜 야하면 죽음의 순간 인간은 무의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로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실험을 해 볼 수 있다.  명상, 사마디가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동적으로 육체를 놓아버림과 함께 그 현상은 언젠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내면에서 자아와 육체사이의 거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 일이 일어나도록 할 수 있다.  내면으로부터 육체를 떠남으로써 우리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죽음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 삶은 꿈과 같다.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깨어난 자들은 삶과 죽음의 차이를 알 수 없다. 그들은 영원한 순간에 살고 있다.

 

- 온 우주가 사원이다. 우리는 어디서나 명상할 수 있다. 명상은 종교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과학이다. 명상을 통해 우리는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