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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월든 Walden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나는 내가 바라는 대로 살고 삶의 본질적인 사실에 직접 부딪혀 가면서 인생의 가르침을 터득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 숲으로 들어갔다.  또한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헛되이 살아온 것을 후회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월든. 책표지

 

월든 Walden (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미국의 사상가, 철학자, 자연주의자, 시인이며, 초월주의 철학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소로는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서 태어났으며,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작가와 사회비평가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단순하고 자급자족하는 삶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했으며, 환경운동과 시민불복종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소로는 특히 자신의 삶과 철학을 자연 속에서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는 초월주의자 랄프 왈도 에머슨의 영향을 받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사상으로 유명합니다. 대표작으로는 《월든》(Walden)과 《시민의 불복종》(Civil Disobedience)가 있습니다.

책 '월든'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매사추세츠 주의 월든 호숫가에서 약 2년 2개월간 생활하며 경험한 자연과의 교감, 자기 성찰, 그리고 단순한 삶의 기록을 담은 책입니다. 이 작품은 1854년에 출간되었으며, 자연주의 철학과 초월주의적 사상이 녹아있습니다.

소로의 철학은 간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환경운동가 존 뮤어 등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에도 생태학, 시민 불복종 운동, 미니멀리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월든》은 단순한 자연 기록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불후의 고전으로 평가받습니다.

 

 

 

나는 어디서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인생을 어느 정도 살다 보면 어떤 곳을 가든 실제로 내가 살기 적합한 곳인지 가름해 보게 된다. 

                                                         

중략

 

집 앞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언덕 위에서 볼 때보다 훨씬 좁지만  그럼에도 갇혀 있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의 상상력을 한층 고조시켜 줄 널찍한 초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맞은편 호수가에는 비탈을 따라 고원까지 이어져서 조그만 참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이는 서부의 대 평원과 몽골의 타타르 대초원까지 길게 이어져 있어 떠돌이 생활을 하는 모든 인간에게  넉넉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일까? 다모다라는 자신이 키우던 가축들에게 더 넓은 목초지가 필요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드넓은 지평선을 자유롭게 뛰노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세상 그 누구도 진정 행복하지 않다 "  시간과 장소가 모두 바뀌면서 나는 우주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역사에 가까운 공간에 살고 있었다. 밤마다 천문하자들이 관측하는 수많은 별만큼이나 외따로 떨어진 지역에서 지냈다.  우리는 천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한 구석 카시오페이아의 의자 뒤로 세상에 소음과 소란에서 벗어난 즐거운 곳이 있을 거라고 늘 상상하고 있다.  나는 내 집이 우주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언제나 새롭고 더럽혀지지 않은  우주의 어느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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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황에 욕조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매일 자신을 새롭게 하라 이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평생을 반복하라"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침은 영웅의 시대를 되살려 내는 법이니까,  이른 새벽 현관과 창문을 열고 앉아 있으면 눈에 보이지도 상상할 수도 없는 모기 한 마리가 온 집안을 헤매고 다니는 앵앵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그 모기 소리에도 예로부터 명성을 칭송했던 어떤 나팔소리 못지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호메로스의 진흥곡이며 그 자체로 자신의 분노와 방랑을 노래하며 허공을 맴도는 일리아스이자 오디세이다.  그 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우주의 기운이 배어 있었다.   또한  이 세상에 영원한 활기와 생식력을 금지당할 때까지 계속 광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침은 하루 중에서 가장 기억할만한 시간이자 각성의 시간이다.  아침에는 졸음이 가장 덜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종일 잠에 빠진 우리 몸도 적어도 아침에 한 시간 정도는 완전히 깨어 있다. 만약 타고난 기질에 의해 잠에서 깨지 않고 하인의 손이 닿아야지만 잠에서 깬다면 새로운 에너지와 내면의 열망에 의해 또한 그와 동반되는 천상의 음악과 대기를 가득 채운 향기에 의해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 공장에서 들리는 종소리에서 깬다면 그런 날은 최소한 바로 전날보다 더 고귀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둠이 비로소 열매를 맺고 환한 빛 못지않게 소중하다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입증된다. 하루하루에 어제보다 더 이루고 신성하며 빛나는 새벽에 1시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삶이 절망하여 어두운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것과 같다. 감각적인 삶의 일부라도 이를 중단해 버리면 우리 영혼은 물론이고 신체기관이 매일아침 활력을 되찾고 그로 말미암아 다시 한번 고결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애쓰게 된다.  모든 기억할만한 사건은 아침의 대기에서 아침시간에 벌어지는 법이다.  이처럼 태양과 보조를 맞추어 활발하고 기운에 가득 찬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 하루는 언제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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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릴 때 왕국에서 쫓겨나 나무꾼의 손에서 자란 한 왕자가 있었다.  그는 나무꾼과 함께 자랐기 때문에 자신이 미개한 종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왕국의 대신이 왕자를 발견하고는 그이 진짜 신분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제야 청년은 자신의 신분에 대한 오해를 풀고 왕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인도의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인간도 자신이 처한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타고난 본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에는 고결한 스승을 만나 진실을 알게 되면 그제야 자신이 '부라마' 즉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실제 존재한다고 믿는다.  누군가 우리 마음을 지나면서 겉모습만 본다면 마음에 물레방앗간은 어디로 가겠는가? 

 

 

이 모든 시간과 장소 그리고 다양한 경우의 수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신 역시도 지금 이 순간 궁극에 닿아 있으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보다 더 신성한 때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를 에워싼 진실을 끝없이 받아들여 완전히 젖어들어야만 비로소  그 숭고하고 고결함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