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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오늘을 처음 사는것처럼 춤추고 사랑하라 ! ( 생의 마지막 날까지 , 홍신자 )

 

나는 늘 지금이 좋다. 나는 지금을 살고 , 지금을 사랑하고, 지금에 대해서 생각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나는 스스로 에게 품고 있는 환상을 깨뜨리는 것부터 시작했었다.  그러려면 우선 내가 나에게 품고 있는 생각을 환상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타인에 대한 환상은 부정적인 현장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부서진다.  그 환상이 부서졌을 때의 아픔이란 별거 아니다. 그러나 자신에 관해서라면 상황이 좀 다르다. 자신에 대한 환상은 너무나도 교묘히 싸인 하나의 작품이자 명작이라 어디를 건드려도 모순을 찾아내기 힘들 만큼 논리적이고 또 조직적이다. 이 명작을 창조한 작가는 바로 교활하고 영악한 나 자신이다.  이 환상은 깨뜨리기도 힘들고 깨뜨리고 난 뒤의 고통도 크다. 

 

 

생의 마지막 날까지 책표지

생의 마지막 날까지 (  홍신자 )  세계적인 아방가르드 무용가이자 대한민국 최초 전위 예술가, 명상가이자 작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손꼽히는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의 몸짓을 춤으로 형상화하여 작품 활동을 이어 가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자유를 찾아 헤매는 것은 그만큼 자유가 없다는 뜻일 테다

자유가 없다는 것은 곧 솔직하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싫은 것도 좋은 척하고 , 부모가 원하는 대로 전공을 결정하고, 애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신의 단점을 감추고 숨긴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손가락질이 두려워 억지로 살고 있는 부부들도 그렇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삶에는 어둠이 드리운다.  솔직하지 못한 삶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상황에 맞는 행동과 말만 한다면 뿌리는 깊게 내릴 수 없고 뿌리야 내리든 말든 빈약하게 키만 큰 나무는 결국 작은 바람에도 쓰러지고 만다.  깊은 뿌리를 지닌 사람들은 평온하고 여유롭다.  자유는 때때로 선택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이 정말 솔직했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회의 규범이나 관습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를 쉽게 포기한다.  그러나 선택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이유다. 내가 가진 비결은 간단하다. 선택의 순간이나 판단의  순간에 나는 스스로를 사랑했다. 

 

 

 

나의 자유를 방해하는 습관적 행동은 멀리한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계속해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받아들이려 한다.  어차피 모든 것은 내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내 힘으로 비워 내려는 것이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은 이처럼 새로운 눈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지금과 전혀 달랐다. 관계의 끝맺음 앞에서는 서운함이나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원망도 미련도 없다. 그저 그런 기분들을 바둑을 두듯 늘어놓을 뿐이다.라는 이유도 붙이지 않은 채로 그 감정을 거기에 그대로 두고 나는 오늘을 위해 떠난다.  자꾸만 로 돌아가는 것은 내가 미성숙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왜는 끝이 없다. 끝없는 질문을 하다 보면 과거에 갇히게 되고 결국은 자유롭지 못한 상태를 만든다.   더 이상 생각을 끈을 늘이지 않고 끊어 내야 한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중요한 법이니 자꾸 과거의 끝만을 붙잡고 있어선 안된다.  현재로 돌아오는 연습을 해야 한다.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면서 자유를 찾아보자. 

 

 

죽음의 에고

에고란 무엇일까? 나라는 존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맞는지 믿기 어려울 만큼 불투명한 존재다. 에고는 그 불확실성에 불안을 느끼면서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외적 조건들을 끌어 모아 증거로 삼으려 한다.  모든 갈망이 여기서 일어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런 갈망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상실한다는 데서 생겨 난다.  그렇다면 육신의 죽음이 찾아오기 전 에고를 먼저 죽일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지금까지 외부로부터 터득해 지니고 있었던 모든 지식과 관념을 송두리째 벗어던지기로 했다. 단적인 언어로는 이러한 합리적이고 조화롭고 질서 있는 혼돈을 모순되지 않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단지 스스로 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한 척의 배고 노를 젓고 있는 사공은 나의 에고다. 그러나 빈배는 사공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물결의 흐름에 따르는 거 외에는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때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했었던 혹은 저 건강 건너편에 이르려고 서둘렀던 사공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나는 빈 배로 떠있겠다. 더러 바람에 흔들리고 물결에 일렁이겠지만 바다로 향하는 순조로운 흐름에 무심히 실려 있겠다. 어쩌면 바다에 이르기도 전에  강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배는 그저 물속에 가라앉은 빈배일뿐이다.  빈배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죽음은 무의 세계다. 그리고 생에 마지막에서 나와 함께 갈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 늙는다는 것은, 계속해서 끝도 없이 성숙해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