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삶을 살아볼 가치가 있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단지 삶이기 때문이다.
스무 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철학의 위로 ( 로랑스 드빌레르 Laurence Devillier) 저자는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로,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그녀는 특히 철학을 일상생활과 연결 지어 사람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하려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철학을 단순히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게 하고, 사람들의 삶에서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지혜를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책 《스무 살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철학의 위로》 (원제: La Consolation de la Philosophie )는 주로 철학자들의 생각을 중심으로 인간의 고통과 어려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출신이 좋지 않거나 자손이 없거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면 삶의 행복은 변질된다. 타고나지 못했거나 출신이 모호하거나 혈혈단신이거나 자식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는 완벽하게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자식이나 친구가 있었는데 그들을 잃었다면 더더욱 행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돈이 있다면 행복하다 충분한 재력이 있다면 친구를 사귀고 영향력을 얻으며 건강을 유지하고 외모까지 가꿀 수 있다. 더 나아가 행복을 대할 때도 마치 돈을 대할 때와 똑같은 태도로 행복을 저축하고 수익성을 높이고 미래의 더 큰 행복을 위해 투자하려고 한다. 마치 이윤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행복이라는 주식을 거래하는 트레이더이자 개미 투자자 들이다.
기쁨 안에도 걱정이 있다.
걱정은 인간이 깨어있으며 활동하게 하고 더 멀리 나갈 희망을 품게 만든다. 강렬한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조차 미세한 열망이 꿈틀거리며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계속해서 자극되는 간지러움은 기계를 작동시키는 작은 용수철과 같다. 욕망과 기대를 비롯한 다른 감정이 전혀 없는 행복은 용수철이 없는 텅 빈 상태와 다름없다. 역설적으로는 이는 우울상태에 가깝다. 행복은 한 가지 감정만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므로 누군가 '행복 가득한 하루 보내세요'라고 외칠 때, 그 말은 실은 권태감이나 무기력한 무관심을 나타내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행복만 가득하다는 것이 오히려 권태로움 무기력함의 표현이 아닐까?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인간은 논할 때 가장 철학적인 명제 중 하나가 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시 만들거나 물건처럼 고칠 수 없는 존재다. 그림이라는 예술작품의 주인이 화가인 것과는 달리 나라는 존재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절대적인 한계다. 우리는 존재하기로 결심하고 태어난 게 아니라 존재를 결정하는 주체도 우리가 아니다. 이는 철학에서는 유한성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얼핏 인간의 결함이나 , 아니 그보다는 결함을 고치치 못하는 무능력을 변명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우리가 원해서 선택적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주어진 것임을 나타낸다. 어머니 뱃속에 자리 잡고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원치 않더라도 살아갈 의무를 짊어진다. 반항기 청소년이나 우울증에 빠진 환자가 외치는 말에 깊은 진리가 담겨 있다. ' 누가 낳아달라고 했어!' 인간의 존재는 선택이 아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1950년대 샤르트르는 자기 원인이 신이 아닌 인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을 끊임없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고 해체하며 스스로 다지는 존재라 여겼다. 샤르트르말을 해석하자면 나는 나 자신을 만들어 내고 몇 번이고 마음껏 자신을 창조하고 재창조한다. 우리는 선하거나 악하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피우지 않도록 의지가 강하거나 약하도록 미리 정해 지지 않았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오로지 나 스스로 결정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깨닫는 행위다. 인간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서다 살면서 수많은 문제의 결정권은 나 자신에게 있다 예를 들어 장애물을 만났을 때 그것을 극복할지 포기할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나다. 샤르트르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그 상황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살면서 벌어진 일은 나로 인해 생기는 , 그 일로 속상해하거나 분노하거나 체념하면 안 된다. 나에게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온전히 내 것이다. 내가 겪는 모든 일의 결정자는 나다. 그 상황이 나를 나타난다.어떤 상황이 절망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 상황을 절망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일도 우연히 벌어지지 않으며 숙명도 아니다. 인생이라는 법정에서 1심, 2심, 3심, 공판의 판사는 모두 나 자신이며 삶의 의미를 나 스스로 결정한다. 이 판결을 회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거기에 선택의 자유라는 종신형이 더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