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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마하무드라의 독백 ( 바그완 슈리 라즈니쉬)

 

마하무드라란 무엇인가? 마하무드라는 단순한 명상법을 넘어 궁극적인 깨달음, 우주의 본질을 직접 경험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어떠한 의도나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깨닫는 것입니다.  마하무드라는 생각과 집착을 초월한, 순수한 무심의 상태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사물을 무심히 바라보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에서 오는 평화를 설명합니다

 

마하무드라의 독백. 책표지

 

마하무드라의 독백 ( 바그완 슈리 라즈니쉬 Bhagwan Shree Rajneesh), 또는 오쇼 (Osho)로 더 잘 알려진 그는 20세기의 인도 철학자, 영적 지도자, 구루입니다. 그는 주류 종교와 전통적인 가치관에 대한 도전과 비판적인 시각으로 유명했습니다. 오쇼는 다양한 종교, 철학, 심리학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삶의 자유로움과 내면의 성찰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의식 확장, 개인의 자유, 정신적 해방에 중점을 둔 사상을 제안했고, 수많은 책과 강연을 통해 그의 사상을 전파했습니다. 《마하무드라의 독백》은 오쇼의 강연을 바탕으로 구성된 책으로, 티베트 불교의 중요한 수행법인 마하무드라(Mahamudra)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마하무드라는 '큰 인장'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깨달음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 수행법은 형식적 명상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모든 것이 그대로 완전함을 인식하는 비형식적 명상으로도 이해됩니다  

마하무드라

마하무드라는 내가 우주와 일체가 되는 완전한 오르가슴을 의미한다.  누군가 사랑했었다면 너와 너의 연인이 하나로 합쳐지며 느꼈으리라. 서로가 서로의 속에 흡수됨을 느꼈으리라. 이제 더 이상 두 사람은 둘이 아니다.  분리된 채로 두목은 남지만 그 어떤 것이 두모마을 하나로 연결하는 다리를 만든다  금빛 찬란한 하나의 삶만이 타오르고 있다.  그 두 극점에서 일체가 되어 진동하는 에너지 만이 타오르고 있다.  이런 경험을 가진 적이 있다면 알 것이다. 마하무드라가 무엇인지를 너는 알 것이다  오르가즘이여! 아! 우주와 내가 일체가 되는 이 전체, 그것은 본질 속으로 흡수되는 것, 이것이 마하무드라의 노래다. 너도 노래는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말할 수는 없다.  춤을 출수는 있다. 그러나 얘기할 수는 없다. 그것은 깊은 현상이다.  그래서 그것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노래할 수 있을 뿐, 그 자체는 노래할 수 없다. 그 자체를 노래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어떻게 노래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최후의 경험 후에 그 기쁨을 춤으로 표현했다. 그밖에 아무것도 그들은 할 수 없었다.   

 

찾아라, 그러면 잃어버리리, 이는 찾는 행위가 찾는 자의 의식을 한층 강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을 발견하리라.  찾으면 찾을수록 그 벽은 두터워지는 것이다.  찾으면 찾을수록 자아는 강해지니  , ' 나는 찾고 있는 자'라는 의식은 강렬해지니 , 찾지 마라! 얻으려거든 찾지 마라! 이것이 마하무드라의 노래전체의 가장 심오한 내용이다.  찾지 마라! 어느 곳에도 가지 마라  아무도 신에 이른 자는 없다. 아무도 도달할 수 없다.  너도 신이 머무는 곳을 모르고 있다. 어디로 가려하는가?  어느 곳에서 성스러운 것을 발견하려는 것이냐?  지도 없고 길도 없다.  신에 이른 자는 아무도 없다. 너에게로 신은 온다.  네가 준비되어 있을 때면 언제든 너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러나 준비란 아무것도 필요 없다. 단지 받아들일 자세만이 필요한 것이다. 모든 걸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을 때  이제 거기엔 자아는 없다.  

 

마하무드라의 노래를 부르며 네가 내 노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내 노래의 뜻을 전해줄 수 있다.  받아 들 일준비란 의심의 구름이 너의 마음으로부터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의심의 마음과 싸우지는 마라 , 의심의 마음을 억누르지도 마라. 억누르는 그 에너지를 차라리 믿음 쪽으로 옮겨 가라.  그러면 의심의 마음에 대하여 무관심해지리라,  무관심이 그 열쇠다.  의심의 마음을 억누르던 에너지를 믿음과 사랑 쪽으로 옮겨라 의심하는 에너지와 믿음의 에너지는 같은 것이다. 

 

 

논리를 통해서는 누구도 결코 진실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합리적 정신은 게임에 불과하다. 논쟁이란 철부지 아이들의 놀이일 뿐이다.  아무런 논쟁도 없이 삶은 그냥 존재한다. 진실은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실은 너의 가슴만을 필요로 하고 있다.  머리로 하는 논쟁이 아닌 , 사랑과 신뢰,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만이 필요할 따름이다.  마하무드라는 온갖 언어와 상징을 초월한다. 

 

인간의 본질은 '무'다. 빈거울이다.  지금의 우리는 잘못되어 있다.  우리는 '있음'에 대한 '없음'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무'는 절대적인 '무, 진공'을 의미한다.  여기 아무것도 없다. 존재가 어디 있는가? 내속에 너 자신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자신이라고 느끼는 모든 것은 그릇된 것이다. 나는 이것이다, 나는 저것이다.라고 느끼는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다.  최후의 경험에 이를 때 난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대는 알 것이다. 너는 내가 아니다. 자아는 없다.  조용히 앉아 두 눈을 감아라  그리고 느껴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  깊이 갈수록 깊이 느끼리라 , 나란 것은 없다고,, 이것이 길을 찾는 사람들을 깊은 명상에 잠기게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사멸이다. 자아는 그릇된 계념에 불과하다. 물리학자들도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다. 부처, 티롯바, 달마대사가 그들의 내면을 통해 이룬 세계를 물질의 세계 속에서 과학이 발견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말한다.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은 자아의 유사 개념이다. 

 

 

사고와 감정의 껍질을 벗겨낸뒤 무엇이 남으랴, 절대의 무, 아무것도 없음이리라. 아무런 도움도 필요 없는 , 아무것도 없으며 , 이 아무것도 없음이 아무것도 없음, 그 자체로 존재한다. 부처가 이렇게 말한 이유가 이것이다. 신은 없다. 신은 이제 불필요하다. 신은 협조자이기 때문이다. 부처는 또 말한다. 조물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내면에서 창조 그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개념 중 하나이다.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깨달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하무드라는 온갖 언어와 상징을 초월한다.  마하무드라는 절대 무의 경험이다. 내가 없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누가 고통받고 번뇌하는가? 누가 울적해하고 슬퍼하는가? 누가 불행해하고 축복을 느끼는가?  부처는 말한다.  네가 축복을 느낀다면 너는 또다시 고통에 희생되리라, 아직 '나'라는   자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없을 때, 내가 완전히 없어져 버릴 때, 고통도 없고 축복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된 의미에서의 축복이다. 여기에 이르면 다시는 무지에 빠지지 않는다.  절대 '무'에 이르는 것은 즉 모든 것에 이르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나는 우주가 되나, 내가 있을 때 나는 의식에 구속된다. 

 

필요한 것은 공간이다. 시간이 결코 아니다.  비어 있어라!  여유를 가져라!   비 인위적인 것이 되어라!   이것이 바로 너의 전생애를 통틀어 제일 중요한 수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