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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다석 마지막 강의 (류영모, 박영호 )

 

다석  류영모선생님은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이 두루 능통했던 대 석학이자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구경각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 우리말과 글로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다.  성경, 불경, 노장 사상, 공자와 맹자등을 두루 탐구하였으며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은  한국적이면서 세계 적인 사상을 세웠다. 

 

 

다석 마지막 강의. 책표지

 

다석 마지막 강의 (류영모,  박영호 ) 류영모는 성경, 불경, 노장 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한 대석학이자 사상가입니다.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구경각에 이른 분으로, 함석헌과 김홍호 같은 20세기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박영호는 류영모의 직제자로, 류영모의 사상을 정리하고 풀이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책은 류영모가 1971년 8월 12일부터 일주일간 금욕 수도 공동체인 '동광원'에서 마지막으로 한 대중 강연의 녹음테이프를 글로 옮기고 박영호가 풀이한 것입니다  이 강연에서는 맹자, 중용, 주역, 구약과 신약 성경, 불경 등을 아우르며 '가르침은 여럿이지만 진리는 하나'라는 일원다교의 사상을 펼칩니다. 류영모는 다양한 종교와 철학의 가르침을 통해 동서양의 사상을 통합하고, 진리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사람의 삶은 '고'이다. 

비눗방울같이 연약한 몸으로 하루에도 오만가지 걱정으로 불안에 떨면서  아프고, 외롭고 , 슬프기 그지없는 삶을 살고 이런 삶을 한마디로 괴롭다고 말한다. 괴롭게 태어나 , 괴롭게 살다가 , 괴롭게 죽는다. 그래서 사람의 삶이란 '고'라고 딱 잘라 말한 이는 석가 붓다이다.  예수도 삶을 괴로움으로 본 것은 석가와 다름이 없다.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괴로움을 여인이 아기를 낳는 산고에 비겼다. 산고와 사고가 하나로 지독한데 가운데 삶이라고 괴롭지 않을 리 없다.  예수는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말했다.  석가 붓다는 삶의 괴로움을 사람이 겪어야 하는 8가지 괴로움으로  말했다. 1. 태어남의 괴로움.  2 일하는 괴로움. 3 앓는 괴로움. 4 죽는 괴로움. 5 사랑의 괴로움. 6 미움의 괴로움.  7 가난의 괴로움.  8 욕망의 괴로움. 이 그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몸 나'는 죽고 '얼나'로는 솟아난다는 뜻이다. 

몸'나'로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리기 전이나 뒤나 석가가 말한 인생 8이고는 달라진 것이 없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이 괴로운 까닭은 원죄로 돌리는데 원죄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삼독( 탐욕, 분노, 무지 )을 말한다.  아담과 아화가 무엇을 따먹어서 그의 자손이 이같이 되었다고 자손들에게 줘다 뒤집어 씌우는데 이따위 말이 어디에 있는가. 사람으로서 예수나, 나는 같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그것만으로 '주'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  예수는 실로 태초부터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었다는 말씀 '얼라'(영적인깨달음을 얻은 인간 )를 '주'라고 하는 것이다. 모두가 다 같이 하느님 말씀에 '얼숨'을 쉬는 일만은 줄곧 이어가야 한다. '얼숨'을 쉬는 이는 모두가 동기이며 동포이다. 괴롭고 허무한 '몸삶'은 아무런 값어치도 없다. 그래서 석가는 괴로움덩어리인 제나( 육체적이고 본능적인 인간 )를 버리는 게 참나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였다.  예수는 영원히 사는 것은 '얼라'이고 '제나'는 부질없다고 말하였다.  예수와 석가의 깨달음까지 이른 유영모는 말하였다.  이 몸뚱이는 멸망한다. 없어져야 할 것이니 없어지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회개, 메타노에오로 시작되는 것이다.  메타노에오란 몸이 참나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몸 나는 죽어도 '얼라'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회개다.  거짓자인 몸을 참나로 착각하는 것이 멸망이다.  이 몸은 가짜 생명의 탈을 쓴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몸 나는 죽고 '얼라'로는 솟아난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잠시 동안의 자기 속임에 불과하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처럼 인간의 삶은 죽음이라는 입안에 들어 형국인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몸 나'의 행복만을 바라고 좇는다.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바로 가르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몸 나'의 살길도 가르 져주어야 한다. 그러나 '몸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교회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해야 하지만 이 땅 위에서 '몸 나'로 축복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가르쳐선 안 된다.  밥 빌어먹고 산 석가와 머리 둘 곳 없이 산 예수인데 어떻게 석가와 예수를 믿으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는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부귀영화가 굴러 들어와도 그것을 멀리하는 것이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이다.   사람의 행복은 어느 정도 의식주가 해결되고 나면 돈이나 명예, 지위들과는 사실상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을 하며 자신이 하는 일을 지지해 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과 친구들을 가진 사람이라면  성공한 삶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합니다. 

 

 

물질생활은 변화하여 지나가는 것뿐이다. 예수 석가는 가정에 갇혀 살지 않았다.  하느님 속이라할 영원한 시간, 무한한 공간, 충만한 성령의 무한대의 하느님 품 안에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