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구도자를 세상으로 불러들이다 ( 십우도 , 오쇼 라즈니쉬 )

 

무엇이 진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우리에게 정해진 목적지는 어디일까?  어떤 동물도 이렇게 묻지 않는다. 나무와 새 이 큰 땅덩어리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이다.  인간은 아주 작지만  하늘보다도 더 거대한 존재다  인간 안에는 독특한 어떤 것, 즉 탐구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 은영원한 순례의 여행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십우도 , 책표지

 

십우도 (  오쇼 라즈니쉬 ) 인간의 탐구 과정을 열 개의 그림과 글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 책은 도가 (道家)에서 유래한 것이나 후에 불교에서 받아들여진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 도 (道)의 목표가 해탈이라 불러도 좋고 여여 (如如)함이라 불러도 상관은 없습니다. 어쨌거나 궁극의 것을 찾아가는 방법을 설명한 글입니다

 

십우도의 역사적 맥락 

원래는 십우도가 아니라 팔우도였다.  그리고 팔우도는 불교가 아니라 도가의 것이었다.  이 그림의 기원에 대해서는 잊혔다.  이 그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제일 먼저 누가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12세기에 이르러 중국의 곽암선사가 이 그림을 다시 그렸다.   그는 다시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그림 두 개를 더하여 십우도로 만들었다.  도가의 그림은 8번째 단계의 끝난다.  여덟 번째는 0이며 무다. 그러나 곽암은 여기에 두 단계를 더 보태였다.  이것이 인류의 종교적인 의식에  선이 크게 공헌한 점이다.  

 

내면의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세상을 등진다. 

그는 구도의 길을 방해하는 모든 것 비 본질적인 모든 것을 버린다.  오로지 본질적인 면만 찾기 위함이다. 그는 무거운 짐을 덜어 버리려고 한다. 그래야 여행이 쉬워진다. 이것은 인간에게 가능한 최고의 정점, 최고의 봉우리에 오르는 여행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버리고 등진다.  또한 그는 마음마저 버린다.  마음이야 말로 모든 세상을 만들 내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욕망과 소유욕으로 들끓는 세상은 외적인 현상일 뿐이다. 내적인 원인은 마음이다.  욕망으로 가득 찬 마음, 욕정으로 불타는 마음, 질투심과 경쟁심, 사념으로 가득 찬 마음,  이것이 세상의 씨앗이다.  그는 안과 밖을 모두 버리고 텅 비게 된다. 완전히 버리는 것 이것이 명상의 전부다. 도가의 그림은 무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곽암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공은 완벽하지만 아직도 더 얻어야 하는 완성의 경지가 있다. 그대는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아직 사랑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는 세속의 저작거리로 돌아온다.  그래야만 원이 완성된다.  물론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돌아온다. 그는 결코 예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을 초월해 살아간다.  그는 다시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나무를 베고 , 물을 긷고 , 걷고, 앉고 , 잠자는 평범한 생활로 돌아왔다.  그는 세상 속에 산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세상이 없다.  세상이 그를 물들이지 못한다.  곽암이 보탠 두 개의 그림은 구도자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들인다. 그는 깨달았다. 이제 그는 똑같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 

 

곽암은 구도자를 세상으로 불러들인다.  

그대는 침묵의 경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 침묵은 아직 완성의 경지가 아니다.  그것은 넘쳐흐르는 현상이 아니다. 내면에서  흘러넘치는 지복이 아니다. 여기서 곽암은 도가와 불교를 넘어섰다.  도가와 불교는 둘 다 0의 단계에서 끝난다.  마치 이 단계에서 여행이 완결되는 것 같다.  그대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달했다. 고요하고 평온하다.  이제 시장 바닥으로 돌아갈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자비심이 흘러넘치지 않는 명상은  여전히 에고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명상은 아직 이기심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울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때 그대의 명상은 아직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명상이 자비심이 되어 사방으로 흘러넘치지 않는다면  나무가 꽃도 피지 못한 상태에서 성장을 멈춘 것과 같다. 

 

십우도는 다음과 같은 열 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심우 (尋牛: 소를 찾아 나섬): 

2. 견적 (見跡: 발자국을 발견하다): 

3. 견우 (見牛: 소를 발견하다):

4. 득우 (得牛: 소를 얻다): 

5. 목우 (牧牛: 소를 기르다): 

6. 기우귀가 (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7. 도가망우 (到家忘牛: 집에 도착하니 소를 잊어버리다): 

8. 인우구망 (人牛具忘: 사람과 소를 모두 잊어버리다): 

9. 반본환원 (反本還源: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다):

10. 입전수수 (入廛垂手: 세상의 구제를 위하여 손을 내밀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그대는 생명을 갖고 있지만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대는 에너지를 갖고 있지만 이 에너지가 어디에서 와서  어느 목적지로 가는지 모른다.  그대는 에너지다.  그런데 그대는 이 에너지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대는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  그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을 모르면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것을 모르는 건 모든 것이 헛되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대 자신을 모르는 한 무엇을 하건 헛되게 끝날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그대 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기본적인 것을 놓친 채 사소한 것에 매달린다.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난다. 

 

그대 안에는 그대만의 운명이 깃들어 있다.  내면에 그대의 청사진이 들어 있다 어떤 것을 쫓아서 무장적 달리기 전에  눈을 감고 내면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면의 에너지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이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그대에게 좋은 것이다.